후금 건국사) 70편 : 1605년 누르하치의 최초의 칭왕
삽화 출처 : 칼부림 (젊은 시절 누르하치와 이성량)
누르하치는 1605년 초엽 무렵, 두만강과 6진 유역에서 줄기차게 벌어지고 있던 울라와 조선간의 무력 충돌을 관측하고 있었다. 이 때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에게 조선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선전함과 동시에 전투에서 노획한 일부 물자들을 제공하기까지 했으나 누르하치는 부잔타이의 행동에 대해 '우리는 지금껏 조선과 다툰 적이 없는데 이제 울라가 조선과 다투어 원한을 만들고 성보를 함락하기까지 하여 상황을 불편히 만들었으니 앞으로 다시는 조선을 공격하지 말라'고 통보하면서 부잔타이의 행동과 자신의 행동 사이에 선을 그었다.
누르하치는 울라에 대해 그러한 행동을 취하는 한 편으로 이러한 정황을 조선에 알리며 조선 역시 본인과 부잔타이를 분리시켜 바라보길 바랬다. 그것은 조선이 자신과 부잔타이를 결부시켜 판단하고 본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혹은 명나라에 선유를 요청할 것을 경계한 것으로 판단된다.
누르하치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누르하치에게 악재가 될 만한 일들을 반복했는데, 하나는 누르하치의 사위인 아로가 조선에 귀순하자 그를 처형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부잔타이의 공격의 배후에 누르하치가 존재한다는 판단으로 명나라에 선유를 요청한 것이다.
사실, 아로의 처형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누르하치 본인 역시 아로의 처형에 대해 격렬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아로의 처형의 경우 아로가 본인의 부친인 로툰과 갈등을 벌인 뒤 조선으로 망명했다가 로툰의 요청(과 더불어 당시 북병사 김종득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처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인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선유 요청은 상당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은 여진의 세력관계 파악을 정탐 및 포로들의 공술등을 통해 입수한 파편적인 정보들에 의존한 탓에 다소 오판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부잔타이의 공격에 누르하치가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부잔타이의 배후에 위치한 누르하치를 선유하면 부잔타이의 조선 변경에 대한 압박도 줄어들 것이라 여겼다.1
조선의 요청으로 인해 요동아문은 1605년 음력 8~9월 무렵 누르하치에게 선유를 진행했다. 누르하치는 본인에게 진행된 선유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였다. 누르하치는 부잔타이의 조선 변경에 대한 무력행위와 본인은 상관이 없으며, 비록 부잔타이가 본인의 조카사위라곤 하지만 자신으로서는 다른 세력의 군주인 부잔타이를 제어할 수 없고, 부잔타이의 조선 공격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으며, 조선은 이미 부잔타이와 칙서(직첩을 의미한다)를 매개로 한 협약을 맺었다고 항변했다.
누르하치는 해당 선유조치를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만포를 통하여 서신을 보냈다. 그것은 이번의 부잔타이의 조선 공격과 지속적으로 일어난 충돌에 대한 본인의 해명이었다. 누르하치는 해당 서신을 빌어 본인은 부잔타이의 이번 공격과 연관이 없으며 조선이 자신과 부잔타이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동시에 본인은 조선을 공격하지 않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항변했다.
해당 서신의 특이한 점은 누르하치가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건주등처지방국왕(建州等處地方國王) 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누르하치로서는 최초로 왕을 자칭한 것이었다. 이 이전까지 누르하치는 조선을 향해서는 '主'2라는 표현을 썼고 명나라를 향해서는 명나라가 자신에게 내린 봉작인 '용호장군'의 칭호를 쓰는 경향이 컸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누르하치가 서신에 스스로를 '왕'으로 칭한 것은 당시 동관 함락과 건퇴 전투를 통해 한(Han, 임금)을 자칭하고 있던 부잔타이에 맞대응코자 본인 역시 왕이라는 표현을 대외적으로 쓰는 동시에 조선과 동등한 입장에서 교섭 및 외교관계를 가지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3
누르하치가 조선을 상대로 위와 같은 해명을 한 무렵, 요동에서는 여진의 땅과 접하고 있던 관전 6보에 관한 사건이 발생했다. 요동총병 이성량과 요동순무 조즙이 관전 6보에 연한 8백여리의 개간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명나라 요민들을 '초무'하여 원적지로 돌려보낸 것이다.
당시 관전 6보는 요동 동쪽의 여진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덕택에 명나라 인민과 여진 인민들의 생활 영역이 겹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관전 6보가 이러한 위치적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은 만력 초에 이루어진 이성량의 개척지 개간 제안으로 인해 진보가 옮겨진 탓이었다.
16세기 말까지는 관전 6보과 그 주변 개척지의 운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건주 세력이 성장하자 그들에 의한 의도적이지 않은 압력 및 의도한 압력 모두에 의해 개척지의 유지가 상당히 힘들어졌다. 이성량은 그 문제를 이유로 하여 관전 6보 인근에 위치한 개척민들을 회수하고자 했고, 조즙이 이에 동의하여 개척민들에 대한 철수가 이루어 졌다. 즉, 관전 6보 인근 개척지의 명나라 인민들이 철수하게 된 근본적 이유는 관전 6보 인근에서 고조되는 여진 세력의 압력을 요동아문이 견디지 못한 탓으로 볼 수 있다.
이는 1605년 말에서 1606년 초 사이에 이루어진 조치였는데4, 이성량과 조즙이 알리기로는 '세금을 피하여 도망친 이들을 초무하였다'라고 하지만 실상은 이성량 본인이 주청한 계획에 의해 개척자로서 합법적으로 농경지를 개간하고 있던 이들을 '지역을 더 이상 지키기 힘들다'는 이유로 강제적으로 축출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는 당시에는 실상이 알려지지 않았고 2년여 뒤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 총병 이성량, 순무 조즙, 계요총독 건달은 물론이요 누르하치 역시 이 문제의 해결에 대한 공로를 세웠다고 하여 포상을 받았다.5 누르하치가 이에 대한 포상을 받은 까닭은 누르하치 역시 적극적으로 이 축출작업에 협조했기 때문(혹은 그들의 퇴거를 요동의 아문들에 요구했기 때문)인데, 당시에는 이것이 '초무'로 포장되면서 누르하치 역시 포상 대상이 된 것이다.
누르하치는 명나라가 방기한 영토를 흡수하여 본인의 세력 역량을 좀 더 강화하였다. 해당 농토를 확보함으로서 누르하치 세력의 농업생산량은 크게 증가했고, 가축 역시 늘어났다. 그러나 해당 영토에 대한 완전한 흡수는 2년여 뒤에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대명경계석비의 건립을 통해 확정된 바였다.
1.해당 선유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필자가 올린 후금 건국사 시리즈의 '1605년 조선의 대명보고와 누르하치의 대응' 참조
2.버일러(beile) 혹은 어전(ejen)으로 풀이된다.
3.이상은 필자가 작성한 '1605년 조선의 대명보고와 누르하치의 대응'에서 누르하치의 직접적 행동과 그와 관련한 부분만을 추려 요약한 것이다.
4.명사 이성량 열전등에는 1606년에 취해진 조치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605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황지영, 李成梁事件을 통해서 본 17세기 초 遼東情勢의 變化, 조선시대사학보 21, 조선시대사학회, 2002, pp.8~9.
5.명신종실록 만력 34년 음력 8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