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애니화 된다고 합니다.
영화게시판에서 보니 내년 1월 개봉이라고 하네요.
이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자주 보지는 못하는 입장에서(보면 너무 가슴아파서)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면 한 번 더 새로운 기분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좋다는 생각도 들고,
막상 개봉하면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극장판으로 만드는 상황이니 쟁쟁한 사람들이 투입되겠지요?
문득 신형철 교수가 쓴 글이 생각나 같이 붙여봅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3779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러스트 앤 본>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다시 보게 하고
사랑의 논리학을 생각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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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네오와 조제의 경우
< 러스트 앤 본 >을 보고 위와 같은 궁리들을 하다가 10년 전의 영화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하 <조제>, 2003)을 떠올렸다. 두 영화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는데, 여자의 다리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어디 하나 건강하지 않은 데라고는 없어 보이는 츠네오(쓰마부키 사토시)가 몸이 불편하고 성격이 내성적인 조제(이케와키 지즈루)에게 다가갈 때 그가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호기심과 동정과 사랑 사이에서 애매해 보이는데, 이 애매함을 견딜 수 없게 된 조제는 츠네오에게 출입금지를 선언하고 둘의 관계는 일단락되지만, 조제의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츠네오는 다시 조제를 찾아간다. 이때도 츠네오의 감정이 분명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츠네오는 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고뇌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타인의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총 세명의 여자와 육체적 접촉을 할 때 그의 표정에는 의미있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진단이 츠네오에 대한 비난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발로인지 혹은 타인의 마음을 상대로 한 분별없는 유희인지는, 츠네오라는 ‘기쁨의 원인’과 관계를 맺고 모종의 변화를 경험한 당사자들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조제는 어떤 변화를 겪었나. 츠네오와 재회한 이후 첫 번째 외출에서 조제는 호랑이를 보러가자고 말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것을 보고 싶었어.” 그녀는 이제 세상(호랑이)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행복한 시간이 흐른 뒤 둘은 불안한 여행을 떠난다. 둘 사이에 생겨나기 시작한 파열을 봉합하려던 것이었으나 상황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통과했다고 느낀 두 사람은 이것이 이별여행이 될 것임을 예감한다. ‘물고기 여관’에서 제의와도 같은 마지막 섹스를 하고 조제는 자신이 해저에서 헤엄쳐 나온 (다리가 없는) 물고기와 같으며 츠네오가 떠나더라도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다독인다. 호랑이와 물고기 사이에서, 둘의 짧은 관계는 끝난다.
냉정하게 말해야 하리라. 츠네오는 한번도 조제를 사랑한 적이 없을 것이다(최소한 지금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의미의 ‘사랑’은 아니었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므로 츠네오에게 버려진 카나에(우에노 주리)가 조제를 찾아가 했던 말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다. “너를 혼자 둘 수 없다고, 지켜줄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츠네오가 말하는데 웃기더라. 당연하지. 걔는 그렇게 착한 애가 아니거든. 솔직히 네 무기가 부럽다.” 카나에는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츠네오의 말은 진심이다. 카나에가 경쟁자인 조제를 이길 수 없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츠네오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제는 어떤가. 츠네오의 감정을 사랑이라 믿고 싶어 하지만 그녀 역시도 카나에의 독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조제는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 독한 진실을 내뱉고 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 조제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의 무기가 더이상 무기가 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예컨대 츠네오가, 이제는 휠체어를 사는 게 어때, 라고 말하는 상황 같은 것. 실제로 그런 상황이 오자 조제는 단호히 거절하면서 점점 더 어린아이가 되어간다.
요점은 이 영화에서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츠네오가 아니라 조제라는 것이고, 츠네오가 어떤 답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서사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 뒤로 우린 몇달을 더 살았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단 하나의 이유만이 있었을 뿐이다. 내가, 도망쳤다.” 츠네오의 대답은 결국 ‘나도 나를 사랑해’가 되고 말았다. 츠네오가 조제를 사랑하는 데 성공할 수 있으려면 조제의 결여(다리)만큼의 결여를 제 안에서 발견했어야 했다. 그러나 츠네오는 실패했다. 예나 지금이나 츠네오에게는 ‘없음’이 너무 없는 것이다. 조제의 집을 떠나며 츠네오가 한발 늦게 오열하는 장면이 그토록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것이 죄지은 자의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실패한 자의 통한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죄가 아닌 실패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조제가 츠네오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를 비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비난하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더 분명해지는 것이지만, 그녀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였기 때문이다. 조제는 성공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아름다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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